재앙 경쟁의 시대, 바야흐로 재현 전략

김남수

1.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남자 주인공이 충고하듯이, 바깥에서 온 사람의 감각에는 허락되는 것과 허락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본다고 해도 보지 못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허락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본다는 것은 재현된 것을 넘어서 재현되지 않은 것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메를로-퐁티는 "보는 것은 곧 사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본다는 것이 곧 신체가 그 체험의 영역에 개입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예를 들 수 있을까요. 가령, 히지카타 타쓰미가 죽음의 심연에서 마치 타버린 신체를 일으켜 세우는 그 섬광 같은 한 순간을 생각해봅시다. 그 장면을 본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함께 산다는 식으로 메를로-퐁티와 거의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신비주의가 아니라 실재입니다. 사실 이 부토의 창조자는 히로시마의 탄화된 신체로부터 비인간의 생명력을 호출하여 인간의 영역으로 출현시켰다고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죽음과 삶,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암흑과 한줄기 내면의 빛, 느림과 내재된 역동 같이 끝없이 간극을 낳을 수밖에 없는 대칭성의 구도는 그의 부토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호소하는 힘입니다.
어쩌면 저는 페스티벌 도쿄에서 그런 것을 원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을 갖게 된 것은 주관적인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행사의 예술감독 치아키 소마 씨 덕분입니다. 그는 2011년 봄의 서울에서 만났을 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래는 그 당시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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